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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문] 제4차 로잔대회 서울선언문
    교단·단체 2024. 10. 3. 19:43

    제4차 로잔대회가 22일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개회한 가운데, 이날 로잔 홈페이지에 ‘서울선언문’ 전문이 게재됐다. 대회 주최 측은 당초 이 선언문에 대해 “2024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의 공식적인 내용 및 방향성”이라며 공개 사실을 알렸지만, 이튿날인 23일 “서울선언문은 대회 마지막 날 공개 예정”이라며 “어제(22일) 실무자의 실수로 홈페이지에 공개된 것 같다”고 밝혔다. 로잔 홈페이지에 공개했었던 서울선언문 전문도 비공개 처리했다. 그러다 이날 오후 “제공된 텍스트에 대한 추가 검토 후 번역이 업데이트 될 수 있음을 유의하기 바란다”는 단서와 함께 전문을 재공개했다. -편집자 주

     

    서문

     

    대한민국 인천에서 열린 제4차 로잔대회는 세계 선교에 헌신한 놀라운 운동의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이다. 1974년 제1차 로잔대회에는 150여 개국에서 2,700명의 교회 지도자이 함께 모여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공동의 신념을 확인했다.

     

    제1차 로잔대회 이후 전 세계 교회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협력하여 세계 복음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이전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지역의 수백만 명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변혁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전례 없는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위대한 사도적 우선순위에 대한 교회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메시지를 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 복음화는 여전히 시급한 과제이다. 더욱이 세계 곳곳의 교회는 이러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수백만 명의 1세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제자도를 효과적으로 양육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마태복음 28:18-20에서 주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위임령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는 교회에 주어진 명령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는 복음적 과업(evangelistic task) 과 “[그리스도]가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목회적 과업(pastoral task)이라는 동등하게 중요한 우선순위가 포함되어 있음을 예수님은 명시했다.

     

    사도행전과 여러 서신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선교 전략에서 이 두 가지 우선순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열정적이었으며,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하여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고 복음의 진리를 훼손하려는 거짓 가르침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똑같이 열정적이었다. 바울은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8).

     

    우리는 지난 50년이라는 복음 전도 추수 기간에, 세계 교회는 새로운 신자들이 진정으로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돕는 데 필요한 가르침을 적절히 제공하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교회는 종종 새신자들이 가정, 학교, 교회, 이웃, 그리고 시장에서 급진적 제자도를 향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하도록 양육하는 데 실패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한 신앙을 약화시키고, 주 예수의 교회의 연합과 교제를 파괴하려는 사회적 가치관과 복음의 왜곡에 대응할 수 있는 지도자를 구비하려고 고군분투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수많은 신자가 복음의 본질적인 가치에서 멀어지게 하는 거짓 가르침과 사이비 기독교적 생활방식의 부상을 경계한다.

     

    로잔운동은 지난 50년 동안 로잔 언약(1974), 마닐라 선언(1989), 케이프타운 서약(2010)의 안내 지침을 따랐다. 제4차 로잔 대회 서울 선언은 이전의 대회 문서들을 온전히 확언하며, 복음의 중심성(제1항)과 신실한 성경 읽기(제2항)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갱신함으로써 로잔 문서의 확고한 토대 위에 세워졌다.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신실하게 증거하고자 노력하면서 현재 세계 교회가 직면한 구체적인 도전(3-7장)에 대처할 수 있다.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


    I. 복음: 우리가 살고 전하는 이야기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고 기록했다. 복음은 일종의 공식이나 일련의 종교적 사상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과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야기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다양한 청중에게 복음을 전했고, 우리는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과 역사적으로 수많은 기독교인이 우리가 살아가며 전하는 이야기로 복음을 받아들인 이유이다.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바로 이 이야기가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말해 준다. 이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우리의 선교를 주도하며, 그 결말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확신하게 한다.”[케이프타운 서약, 2010]

     

    태초에 하나님은 의미와 신비로 가득 찬 영적, 물질적 실재의 놀라운 상호 의존으로 우주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질서 있고 아름답고 선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축복하여 각 피조물이 전 피조물의 번영을 위해 존재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땅과 하늘과 바다 등 모든 영역에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의 숨결과 번식 능력을 부여하셨다. 하나님은 창조의 정점으로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셨고, 이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셨으며, 세상을 돌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일과 놀이, 결혼과 자녀 양육, 예술과 산업, 그리고 공동생활의 형태는 모두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은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축복이 되고, 축복은 예배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말씀으로 이 놀라운 창조의 행위를 성취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주실 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면 생명의 흐름이 멈출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 한 분만이 생명이시므로 그러한 선택은 곧 죽음이 될 것이다.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는 사탄이 주도하는 반역에 가담했고,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 문화적으로 다양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민족으로 땅을 채우라는 사명을 받은 인류는 땅을 폭력으로 가득 채우며 지음 받은 하나됨을 깨뜨렸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서 추방되고 생명과 단절된 인간은 자기 의지에 사로잡혀 무의미한 존재로 속박되었다.

     

    그러나 자비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 피조물을 스스로 선택한 속박에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또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의 반역을 처벌하지 않고 내버려둘 수도 없으셨다. 하나님은 오실 구세주를 통해 무력한 상태에서 인류를 구출하고 모든 민족이 예배로 연합하여 하나의 거룩한 백성으로 회복되는 계획을 세우셨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말씀으로 그의 피조물을 변혁하실 것이다.

     

    땅의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을 한 민족에게 회복시켜 주시고, 그를 통해 다시 모든 민족이 서로 축복하는 관계로 연합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백성은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새 창조를 위한 새로운 인류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전에 아브라함의 후손, 즉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을 딴 열두 지파로 구성된 한 나라를 선택하셨다.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형성된 그들은 바로의 노예가 되어 압제를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언약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노예 상태에서 이끌어내어 모든 민족에게 자신의 탁월함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여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권능의 말씀을 선포하셨고, 하나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살아 있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백성을 형성하는 권능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반역했다. 그들은 생명 대신 죽음을 선택했다. 하나님께서 충만한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면 그 백성은 멸망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도록 왕권을 제정하셨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하신 말씀을 해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바로잡도록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삶의 방식을 유지하도록 지혜자들과 시편 기자들을 보내셨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은 반역했다. 그들의 왕과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떠났고 백성들은 예언자들을 거부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어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므로 이스라엘을 정죄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잊지 않으셨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죽음을 경고하면서도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돌아왔을 때,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새 생명으로 일으키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이 민족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반역적인 인류를 다루실 때 일어날 극적인 사건,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의 회복을 예고하는 것에 불과했다.

     

    아직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말씀으로 창조 세계를 새롭게 하실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때가 왔다. 하나님은 선지자 세례 요한을 보내셔서 자신이 세우신 왕의 임박한 도래를 준비하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기 위해 죄에서 돌이키도록 촉구하셨다. 세례 요한은 죄에서 돌이킨 사람들에게 세례(침례)를 베풀었지만, 아직 오지 않은 세례에 대해서도 말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성령 세례는 민족들 가운데 언약 백성을 이룰 것이다.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오실 분은 오셨지만, 가장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오셨다.

     

    성령을 통해 영원한 말씀인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시작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인간이 되셨다.

     

    예언자들이 예언한 하나님의 회복된 통치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주면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지만, 그분은 신실함을 증명하시고 제자들에게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에 진심으로 순종하도록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더럽혀진 자를 깨끗하게 하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멸망하는 자를 구원하셨으며, 귀신을 쫓아내셨다. 이 모든 점에서 예수님은 축복을 회복하는 능력, 즉 죄에서 깨끗해지고 죽음에서 구원받고 사탄의 통치에서 해방되는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새롭게 갱신할 때가 왔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이 선포한 축복은 부나 건강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변혁하는 능력인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었다. 메시아 예수님이 교회를 세울 때가 도래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그분의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죽음이 필요했다.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놓인 죄의 공격이 모든 사람에게 죽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새 창조의 아담인 우리의 대속자로 죽으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스스로 짊어지셨다. 자신 안에 생명이 있는 분이 세상의 생명을 위해 목숨을 내어 주셨다. 그분은 정죄를 받으셨지만, 대속 받은 그의 백성은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죽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다 쏟아부으셨지만, 죽음에 의해 패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므로 그분의 무죄와 의로움을 증명하셨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변화된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예수님의 몸은 제자들이 만질 수 있었지만, 죽음은 만질 수 없는 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만물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할 때까지 함께 통치하시기 위해 아들을 높이셨다. 그리고 회개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한 백성 안에서 모든 민족의 갱신과 화해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셨다. 그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좋은 소식을 증거하기 위해 새 생명과 능력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영을 통해 말씀으로 형성된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에 속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실 때, 새 창조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다. 그다음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육체적 부활에 참여할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가 변화될 것이다. 하나님 백성은 메시아의 통치 아래서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이라는 독특한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연합된 백성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백성은 모든 선의 근원인 하나님을 중심으로 축복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세상을 돌보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한 하나님의 한 백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우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믿음으로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세례를 받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한 몸에 연합된다. 믿음으로 우리는 부활하신 분의 의로 의롭다고 선언된다. 믿음으로 교회는 그의 영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가 되며, 그분은 우리의 끝없는 생명의 원천이시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위해 살아간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서로를 돌보고 관리하고, 우리 사회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일하며, 신실한 섬김의 평화로운 삶을 추구한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생명 안에 우리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사망이 파괴할 수 없는 자로 살아간다.

     

    우리가 지역 교회에 모일 때, 우리는 만물의 참된 이야기인 복음을 살고, 연습하며, 기억한다. 우리는 예배에서 은혜로운 그 이야기의 저자와 그의 업적을 송축한다. 우리는 우리의 교리에서 복음의 핵심을 명확히 정제한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에게 그 모범과 명령에 삶을 일치시켜 순종하도록 가르친다. 우리는 사랑과 정의, 용서와 화해의 실천에서 그 효과를 드러낸다.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그 가치를 반영한다. 우리의 존재, 실천, 그리고 선포를 통해 우리는 땅 끝까지 복음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동안 우리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새 창조의 완성을 위해 탄식하며 외친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 아버지시여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영을 통해 새 창조의 충만함을 주시옵소서!”

     

    II. 성경: 우리가 읽고 순종하는 성경

     

    로잔운동의 시작부터 로잔운동의 기둥은 교회와 선교, 기독교인의 삶을 위한 유일한 신앙과 실천의 원칙인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서 성경에 대한 확고한 헌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높은 성경관이 항상 복음을 옹호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를 삼는 교회의 선교를 강화하는 신실한 성경 해석을 낳은 것은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종종 상충되는 해석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는 교회의 효율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높은 성경관을 확언하려면 성경의 역사적, 문학적, 그리고 정경적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교회의 해석 전통에 따라 성경을 읽는 방식이 필요하다. 오늘날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성경에 대한 중요한 확언은 성경의 본질뿐 아니라 성경 해석, 즉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성도의 교제와 함께 성경을 신실하게 읽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말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성경이 구약과 신약 66권으로 구성된 신적 영감과 하나님의 숨결이 담긴 기록물인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언한다. 성경은 다양한 인간 저자와 문학 장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위해 한 백성을 선택하신 이야기를 통일되고 일관된 증언을 구성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므로 교회의 성경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모으고 다스리는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오류가 없다. 성경은 전적으로 진실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교회의 삶을 위한 최상의 규범이다. 성경에 영감을 불어넣는 같은 성령이 지속적으로 성경을 조명하며 하나님의 빛과 생명, 진리와 은혜를 전달한다.

     

    성경의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이다.

     

    우리는 성경의 중심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즉 예수님의 성육신,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의 선포이며, 이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임을 확언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이 복음에 따라 그리고 이 복음의 안내에 따라 읽는다. 복음에서 하나님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죄 용서와 성령의 은사와 영생을 주신다. 예수님이 자신의 피조물을 화해시키고 새롭게 하시며 죄와 그 영향을 제거하여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교회를 세우신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다. 이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므로, 우리가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 성령에 의해 변화된다(사 52:7; 막 1:14-15; 창 12:1-3; 18:18-19; 갈 3:16, 19).

     

    성경의 목적은 제자를 형성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인 교회를 세우고 통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언한다. 성경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촉구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면한다. 성령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형성하기 위해 역사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사용하여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민족들 가운데 택한 민족인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신다(골 1:15, 3:10, 엡 4:24, 마 6:10).

     

    우리는 성경의 문맥에 주의를 기울이므로 신실하게 성경을 읽는다.

     

    우리는, 성경을 신실하게 읽고 해석하기 위해서 교회가 성경의 역사적, 문학적, 그리고 정경적 맥락에서 성경을 읽어야 함을 확언한다. 역사적 맥락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본문의 배경이 되는 세계와 본문이 쓰인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문학적 맥락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문학인지 그리고 더 넓은 본문 내에서 단어와 아이디어의 흐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정경적 맥락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에 비추어 각 부분을 함께 읽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본문을 적절한 역사적, 문학적 맥락에 배치하는 것은, 저자가 의도한 본래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꼭 필요한 단계이다. 정경적 맥락에 성경을 배치하면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그의 백성에게 주신 통일된 이야기, 즉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절정에 이르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신실하게 성경을 읽는다.

     

    우리는 성경의 구성을 감독하신 성령이 교회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도움을 구할 때 성경 해석에 있어 교회를 계속하여 인도하신다는 것을 확언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세상에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려는 교회의 헌신에 힘을 실어주고 알려주기 위해 성경을 듣고, 읽고, 해석하고, 행하는 공동체인 교회에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임재의 일부이다. 성령은 성경의 진정성, 신뢰성, 충족성, 그리고 신뢰성에 대한 내적 증언을 제공한다. 성령은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이해하고 복종할 수 있게 해준다(벧후 1:21).

     

    우리는 전통과의 연결을 유지함으로써 신실하게 성경을 읽는다.

     

    우리는 복음주의적(복음 중심적) 성경 해석이 최근의 발전이 아님을 확언한다. 그것은 사도적 교회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해석 전통을 이어간다. 성경에 대한 신실한 해석은 보편적 교회에 속하며, 다양성 속에서 복음의 일치를 추구하기 위해 지역적, 역사적, 그리고 교파적으로 서로 다른 상황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대화를 요구한다. 우리는 동일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동일한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한 복음을 믿은 과거 세대의 신실한 성경 읽기의 연속성을 전승하는 전통의 필수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확언한다. 복음주의적 해석 접근법이 신실하기 위해, 이러한 전통을 존중해야 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성경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지역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신실하게 성경을 읽는다.

     

    우리는 신실한 성경 읽기를 위해 문화적 맥락의 중요성을 확언한다. 성경 해석은 결코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화와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의 전제, 개인적 경험, 그리고 문화가 강력하고 잠재적으로 왜곡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도전적인 일이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는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심화하는 데 있어서 그들 각각의 상황 가운데 긍정적인 자원을 제공한다. 각 지역 교회는 각자의 상황에서 성경을 신실하게 읽는 데 있어 전체 교회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지역 문화에서 얻은 독특한 통찰력을 통해 전체 교회에 유익을 준다.

     

    우리는 지역 교회를 읽고 듣는 문화로 형성함으로써 신실하게 성경을 읽는다.

     

    우리는 지역 교회들이 개인, 그룹, 그리고 예배 공동체로서 성경을 공적으로 읽고 신실한 성경 읽기와 듣기를 형성하는 데 헌신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한 문화를 형성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선포하는 복음이 우리의 세계관과 삶을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지체의 전 세계적인 협업의 필요성과 고대의 신조,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 전통에 대한 주의를 확언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도의 교제 안에서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은, 지역 공동체가 단번에 성도들에게 전달된 신앙에 닻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교회가 번성하려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과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주되심을 신실하게 선포하고 나타내는 신실한 성경 읽기와 경청 공동체로 우리 자신을 형성해야 한다.[1] (유 3장)

     

    III. 교회: 우리가 사랑하고 세우는 하나님 백성

     

    로잔 언약(1974)은 “세계 복음화는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할 것을 요구한다”고 선언했다. 제4차 로잔대회(2024년)의 주제는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를 어떻게 상상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세계에서 기독교가 놀랍게 확장되는 동안 교회 교리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교회가 무엇인지, 기독교인의 삶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중요성 그리고 교리와 세상과의 관련성에 관한 합의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 결과로 초래한 혼란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의 가치를 왜곡하는 비정상적인 형태의 교회에 길을 열어주었다. 또한, 그것은 세례를 받은 신자들 가운데 환멸이 커져서 공식적 또는 제도적 교회와 거리를 두게 했다. 오늘날 기독교인, 특히 1세대 신자들에게는 교회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성경적 이해, 즉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 안에서 행하므로 깊은 감사와 충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성경적 이해가 필요하다.

     

    교회는 하나님 백성의 교제이다.

     

    고대의 사도신경은 “성도의 교제”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신앙을 고백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해 성령으로 그의 백성을 하나의 성도의 교제(communion of saints)로 모으고 연합한다. 하나님과 교회의 형제자매와의 이러한 교제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오순절 날, 하나님은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그의 백성에게 부어주므로 이 연합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들을 새로운 공동체로 끌어들여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성령 가운데 내주하도록 하셨다. 오늘날에도 주 예수님은 교회에 성령을 계속하여 부어주고 성령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 주 예수님께 계속하여 영광을 돌린다(고전 12:27; 고후 6:16).

     

    개인적인 회개와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함께 그분의 몸을 이룬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으로서 구원을 받았지만, 혼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서로 함께 구원받은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를 그분의 흘리신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 안에 통합하신다. 기독교 세례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충성과 그의 교회와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표징이자 인봉(sign and seal)이다(고전 12:13).

     

    교회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이다.

     

    수 세기 동안 전 세계 그리스도의 백성과 함께 우리는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에 의거하여 교회가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임을 고백한다.

     

    전 세계와 역사를 통틀어 교회는 하나의 성령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한 백성, 그리스도의 한 몸, 성령의 한 성전이며 그리스도의 한 신부이다. 시간, 공간, 문화, 그리고 언어를 초월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완성된 사역으로 연합하고 성령으로 내주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함께 연합된 하나의 교회이다(엡 4:4-6; 고후 11:2).

     

    그리스도의 가시적 표현인 교회는 그리스도와 같은 거룩함으로 부름 받았으며,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자로서 살기로 결단하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과 행동으로 드러난다(딤후 2:21; 벧전 1:14-16).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인종, 성별, 지역, 지위, 그리고 능력에 관계없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그의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 안에 동등하게 속한다는 점에서 보편적(보편적이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이다. 그러므로 각 부분이 교회의 온전함을 구성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모든 구성원을 위한 자리가 있다. 소년과 소녀, 여성과 남성, 목회자와 선교사, 주부, 교육자, 노동자, 전문직 종사자, 그리고 일터의 지도자를 위한 자리가 있다.

     

    보편적 교회에서는 어떤 인간 문화도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다. 모든 인간 문화는 모든 지혜를 소유하신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머리를 숙여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각각의 문화는 성경을 이해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데 공헌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로 연합하여 우리의 모든 다양성 속에서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고 나타내신다. 지역 교회는 보편 교회의 유일한 가시적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 안에서 산 돌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한다(고전 3:16-17, 12:12-27; 엡 2:20-21; 벧전 2:4-10).

     

    이러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도 사도적이다. 오순절 날 성령의 부으심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공개적으로 증거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 온 세상에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해 왔다. 역사를 통틀어 모든 곳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단번에 맡기고 대대로 전수한 가르침을 견고하게 붙잡음으로써 연속성을 유지하며 지탱하는 사도적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살아 있고 활동적인 말씀의 선물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과 새 생명을 주심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그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도록 만드신다(롬 10:17; 벧전 1:23; 유 3).

     

    순례하는 교회는 외부로부터의 도전과 내부로부터의 위협에 직면한다.

     

    교회는 항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상에는 많은 시련이 있을 것이다.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신실한 성도들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박해와 심한 반대에 직면해 왔고 지금도 직면하고 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둠의 권세에 대한 것이다. 악한 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적하지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는 그의 교회를 계속 세워 나가시며 음부의 권세조차도 교회를 이길 수 없다(요 16:33; 엡 6:12; 마 16:18; 계 1:18).

     

    교회는 연약함과 겸손함으로 복음의 보물을 ‘질그릇'(earthen vessels)에 담아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권세나 무기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의의 영적 무기로 온전히 무장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경과 고난을 인내하며 견딘다. 제국은 흥망성쇠 하지만, 주님이 붙드시는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자 터인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속(household of the living God)으로 굳건히 서도록 부름 받았다(고후 4:7; 요 18:36; 고후 6:7; 딤전 3:14-16).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항상 이 부르심에 충실하지 못한 것을 슬퍼한다. 성경은 교회의 생명력과 메시지의 진실성에 대한 더 큰 위험은 내부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예언자적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포기하므로 너무 자주 정치적 권력의 유혹, 문화적 인식과 세상의 쾌락의 유혹에 굴복해 왔다. 이러한 경우 교회는 억압의 도구가 되고 불의한 행위에 연루되며 세상에서 신뢰를 잃게 된다. 이러한 타협은 교회가 단순한 세속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함으로써 성경의 권위에서 멀어진 결과이거나 그 원인이 된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눈을 돌릴수록 신실한 믿음과 실천의 두 기둥인 정통 교리와 정통 실천(orthodoxy and orthopraxy)은 약화된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의 실패와 죄를 애통해하며 성령의 확신과 주님의 명령을 계속하여 무시하는 태도를 회개한다(딤전 4:16).

     

    교회는 예배로 모일 때 성장한다.

     

    주 예수님은 성령으로 아들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함께 모이도록 그의 교회를 부르신다. 이러한 모임을 통해 성경을 읽고 선포하며 세례와 성만찬 가운데 그분의 은혜를 보고 느끼고 맛보면서 그분에 대한 친밀감과 지식이 자라도록 우리를 초대한다(행 2:42).

     

    그리스도의 한 몸이며 한 성령의 성전인 교회는 주로 예배를 통해 그 정체성을 드러낸다. 함께 드리는 예배 가운데 우리는 교회의 정체성을 구현하고 교회됨의 의미를 보여준다. 이는 예배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사건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주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찬양)을 선포하는’ ‘왕 같은 제사장’(royal priesthood)이며 ‘거룩한 나라’(holy nation)이다(벧전 2:5, 9).

     

    교회는 말씀과 성만찬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자신을 교회로 구별한다. 예배의 이 두 가지 기본 요소는 교회를 정의하는 표지(marks)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다른 많은 교회의 실천 중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근본적인 실천이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선교적 노력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선교 사역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끝날 것이지만, 예배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교회가 근본적 실천으로 예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설교, 기도, 그리고 찬양을 통해 예배를 더욱 공동체적 경험으로 만들 것을 요청한다.

     

    올바르게 질서 잡힌 예배는 지역 교회의 권위와 규율 아래 이루어진다. 이는 신자 개인뿐 아니라 교회 전체의 안녕을 위해 필수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기독교인이 지역 교회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청한다. 지역 교회가 건강하고 성숙해지면 개인이 성장하듯이, 지식, 친밀감, 그리고 책무에서 개인이 성장하면 지역 교회도 성장한다(고전 5:1-6:11; 히 10:25).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백성을 성숙하게 하고 세우기 위해 교회 안에 사역과 섬김의 은사를 두셨다.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공동선을 위해 신자들 가운데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몸은 신자 개개인이 책임감을 가지고 사역을 수행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발휘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으로 형제자매들을 섬길 때 성장한다. 이러한 사역은 모든 하나님 백성이 일터, 시장, 가정, 학교, 그리고 지역 사회 등 그들이 섬기도록 부름 받은 모든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도록 능력을 부여한다. 그들은 주 예수님이 자신의 교회를 돌보시고, 교회의 보호와 안녕을 위해 끊임없이 중재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양한 소명을 완수한다(롬 12:6-8; 고전 12:4-11; 엡 4:7-16).

     

    교회는 다양하지만, 신실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교회는 모든 사회에서 지역적이고 대항 문화적 공동체를 형성하여 공동의 삶을 표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지역 교회는 비밀리에 모이는 작은 소그룹 모임(small bands)부터 가정 교회와 공개적으로 모이는 대규모 교회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다. 디지털 공간의 출현은 기독교 신자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을 제공했으며, 지역 교회의 본질과 형태에 관한 지속적인 신학적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역사와 전 세계에 걸쳐 지역 교회는 고유한 문화의 영향과 그들이 직면한 독특한 상황적 도전에 의해 형성된 전통과 형태에서 놀라울 정도로 다양성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독교 공동체의 공통점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진정한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공통의 믿음,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과 나누도록 부르신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도록 부름을 받았다. 대위임령은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순종을 가르침으로써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뜻에 동참하도록 모든 신자를 모든 곳으로 초대한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게 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충만한 임재(Christ-filled presence), 그리스도 중심의 선포(Christ-centred proclamation),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은 실천(Christlike practice)을 통해 이를 수행한다(마 28:18-20).

     

    예수님은 온전함을 유지하여 힘을 결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이 땅의 소금’으로 제자들을 묘사하므로 제자들의 존재(presence)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깨닫도록 촉구하신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영감을 받은 기독교인이 어떻게 ‘구원받는 사람들과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지 설명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은총을 알리고 오랫동안 소외된 세상에 자신이 가까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구속 받은 그의 백성을 사용하듯이, 가족, 이웃, 학교, 일터, 광장 등 모든 사회에서 기독교인 개인이나 공동체의 존재를 희망의 이유가 되게 한다(마 1:23, 5:13; 고후 2:15-16).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신실하게 선포하는 것은, 교회의 증거에 필수적이며, 이 과업을 위해 주님은 신자들에게 복음 전도를 위한 능력을 주시려고 성령을 부어주셨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복음의 구원 능력을 나타내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곳에 복음을 선포하는 사자들(heralds)을 보낸다. 가정과 일터에서 매일의 증거를 통해 하나님은 계속해서 모든 족속과 방언의 사람들을 자신에게 모아 예수님의 속죄의 보혈로 그들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들을 연합한다(롬 10:17).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와 같은 실천을 통해 증언한다. 세상이 복음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에 관해 듣는 것처럼, 서로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 우리가 그분의 피조물을 돌보고 일상적인 소명에서 훌륭한 일을 하는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믿음이 들음으로 인하듯이, 믿음에는 항상 행함이 수반된다. 이러한 행위는 공동선을 증진하고, 가난하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며, 주님의 본을 따라 정의의 대의를 진전시킨다(마 5:16; 요 13:35; 엡 2:8-10; 눅 4:18-19).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마지막 날까지, 교회는 신부로서 신랑의 재림을 기대하며 과거 세대의 성도들도 부활할 것을 기대하며 모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소망이 완성되는 날,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전능하신 주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알게 될 때를 기다리며 그에게 영원히 예배 드리기를 열망한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21:3; 엡 3:21).

     

    IV.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회복되는 존재

     

    오늘날 세계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에 몰두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기독교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는 세상에서 증언과 교회의 삶에 깊은 함의를 갖는다. 이 질문은 정체성, 인간의 성, 그리고 발전하는 기술의 함의와 같은 이슈와 관련하여 세계적인 격변의 핵심을 다루고 있다. 인간에 대한 건전한 교리는 교회 내에서 초인적인 힘과 신과 같은 권위를 주장하는 지도자들이 증가하는 현상을 다루는 데도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됨의 본질이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고유하게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이 고유성에는 세상에서의 청지기 역할과 책임이 포함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선물은 성별, 민족, 인종, 계급, 나이, 신체적, 정신적 능력, 그리고 사회경제적, 문화적 상황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고유한 존엄성과 평등과 가치를 제공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와 공동체 형성을 포함한 관계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창 1:26-28; 2:15).

     

    인간은 육체를 보완하는 영적 차원을 소유한 육체적, 영적 통합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과 영 중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에 대한 특권을 갖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는 정도에, 죄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식한다. 죄는 우리의 고유한 인간 본성과 능력,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에서 인간의 소명을 타락시킨다. 죄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인격체가 아닌 물건으로 취급하도록 악영향을 미친다. 때때로 기독교인조차도 다른 사람을 소외시키고 비인간화하여 자기 이익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잘못 해석했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확언한다.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으로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 첫 번째 아담과 달리 그는 죄 없는 삶을 사셨고, 따라서 인류를 죄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서 구속할 자격을 갖추셨다. 하나님의 탁월하고 완전한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가 성령에 의해 변화되는 인간의 이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면서 은혜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닮음은 우리의 성품, 실천, 욕망, 그리고 열망의 갱신과 재림 시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의 형상으로 변화될 때 드러난다(골 1:15; 히 1:1-3; 요 1:1, 14; 빌 2:1-11; 엡 1:1; 롬 5:12-14; 고전 15:45-49, 50-54).

     

    교회는 신자들을 하나님과 서로 화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이다. 이 새로운 인류는 참되고 온전한 인간성을 정의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변화되고 있다(엡 2:14-16; 롬 8:9; 12:1-2; 고후 3:18).

     

    구속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교회의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고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은사와 사역을 부여받았다. 모든 기독교인은 다양한 은사와 소명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하나님 나라의 대사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표현과 실천은 복음과 성경에 대한 사도적 증거와 비교 검토되어야 하며, 어느 누구도 거짓 복음에 속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에 동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전 12:4-7; 롬 12:4-8; 엡 4:11-16; 고전 1:4-8; 벧전 4:10-11; 마 7:15-16; 갈 1:6-9; 요일 2:19; 유 3-4).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은 이상과 모순되는 새로운 인간성에 대한 거짓된 개념을 애도하며, 일부는 심지어 신성을 소유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 번영과 명성에 기반한 사역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그리스도 닮음(Christlikeness)에서 멀어지는 기독교 리더십에 대해 슬퍼한다. 그리스도의 리더십의 본은 그러한 주장과 영적 권위의 표시로써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것에 도전한다. 겸손과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존은 하나님 나라 삶의 특징이다(눅 9:23; 빌 2:8-11; 3:18-19; 고전 15:9-10; 요일 1:8-10).

     

    우리는 몸의 부활과 새 창조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그때에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이 온전히 새롭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과, 서로와, 모든 피조물과 함께 충만한 생명과 교제를 누리게 될 것이다(사 65:17; 66:22; 벧후 3:13; 계 21:1-4).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섹슈얼리티

     

    성 정체성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인간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명확하게 식별 가능한 신체적 특징과 남성과 여성이라는 관계적 특징을 가진 성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다루고 있다. 개인의 ‘성'(sex)은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생물학적 특성을 언급하며, ‘젠더(gender, 성별)’는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연관성을 언급한다. 성경은 남성과 여성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돌보는 창조주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확언한다(창 1:26-28; 2:22-23).

     

    우리는 섹슈얼리티(sexuality, 성적 지향성)에 대한 왜곡을 탄식한다. 우리는 개인이 우리의 창조성과 무관하게 젠더을 결정할 수 있다는 개념을 거부한다. 생물학적 성(sex)과 성별(gender)은 구별될 수 있지만, 분리할 수 없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인간 창조의 고유한 사실로서, 문화권에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할 때 표현하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성별 유동성(gender fluidity, 상황과 경험에 따라 성 정체성이나 성별 표현이 유동적이라는 주장)이라는 개념도 거부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태어날 때 성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들(오늘날에는 광범위하게 인터섹스[intersex individuals]로 지칭됨)은 중대한 심리적이며 사회적인 어려움에 처해 왔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소외와 고통을 경험하는 내시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현하고, 존엄성의 회복을 약속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들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은 오늘날 이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향해 긍휼과 존중으로 응답하도록 부름 받았다(사 56:4-5).

     

    결혼과 독신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성경에서 결혼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결혼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며, 결혼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배타적인 결합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성경이 ‘한 몸’(one flesh)으로 언급하는 새로운 존재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결혼이 평생 서로 사랑과 나눔의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결합에 헌신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독특하고 배타적인 언약 관계임을 확언한다(창 2:24; 마 19:4-6).

     

    더욱이, 성경은 언약적 결혼이 성관계의 유일한 합법적인 상황이라고 일관되게 가르친다. 결혼의 범위를 벗어난 성관계는 창조주의 설계와 의도를 위반하는 죄악이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동성 파트너십을 성경적으로 유효한 결혼으로 정의하려는 교회 내 모든 시도를 애통해한다. 우리는 일부 기독교 교단과 지역 교회가 문화의 요구에 굴복하여 그러한 관계를 결혼으로 성별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슬퍼한다.

     

    우리는 결혼이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데 필요한 상황을 제공함으로써 인간의 번영을 위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임을 확언한다. 신실한 결혼은 자유를 적절히 제한하고 자녀가 번성할 수 있는 안전한 양육 환경을 조성하므로 가족생활의 강한 유대를 가능하게 한다.

     

    결혼에 대한 성경적 비전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주의 명령을 이행하는 동시에 부부에게 동반자 관계와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개인적, 사회적 선으로 인식되는 성적 자유의 추구가 결혼 내 성관계의 출산적 측면(procreational aspect)을 경시하여 전 세계적으로 자녀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종종 급격한 낙태의 증가로 이어진 것에 대해 슬픔을 금할 수 없다(창 1:28; 2:18-25).

     

    기독교인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본으로 삼고 있으므로 남편과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제자로서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할 때 복음이 실현되는 독특한 증거의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결혼을 선택한 기독교인은 결혼 관계를 돌보고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거나 입양되는 자녀의 양육을 위해 필요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엡 5:22-31).

     

    결혼은 모든 사회에서 성인에게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고 결혼 생활에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보완하지만, 결혼이 한 사람을 완전하게 만드는 필수적인 단계는 아니다. 결혼한 사람과 독신자 모두 창조주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개개인은 다른 인간관계의 맥락에서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이다. 이상적인 인간인 주 예수님은 독신의 삶에 관한 이 진리를 모범적으로 보여주셨다. 사도 바울은 상황적이든 직업적이든 독신은 결혼한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대의를 섬기는 기독교인만의 독특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긍정적으로 주장했다(고전 7:32-35).

     

    우리는 모든 지역 교회가 기독교 신자 공동체 안에서 교육, 멘토링, 그리고 상호 격려와 실질적인 지원 네트워크를 통해 독신자와 결혼한 부부 모두를 지원할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충성의 맥락 안에서 깊은 우정, 결혼 생활에서의 사랑과 신실함, 부모 공경, 그리고 헌신적인 자녀 양육이라는 성경적 가치의 모범을 보이므로 복음의 능력을 증언한다.

     

    동성 성관계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동성 간의 성적 친밀감은 인류 문명만큼이나 오래된 현상으로, 신·구약 성경은 이러한 관행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성경에서 동성 간 성행위에 대한 명확안 언급은 여섯 차례나 발견된다. 오늘날 사회와 교회에서 이 주제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성경에서 동성 간 성적 친밀감에 대한 모든 언급과 문맥상 그 의미를 숙지하는 것이 중요하다(창 19:1-3; 레 18:20; 20:13; 롬 1:24-27; 고전 6:9-11; 딤전 1:9-11).

     

    구약 성경은 창세기 19:1-3에서 동성 간 성행위가 언급되며, 이는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의 삶이 하나님께서 심히 악하다고 선언하신 소돔의 문화와 교차하는 장면이다. 소돔의 악명은 여러 형태의 사회악에서 비롯되었으며, 모든 마을 사람들이 롯의 손님들을 강간하려 한 사건이 이 이야기에서 그 도시의 지독한 도덕적 상태를 보여주는 증거로 강조되었다(겔 16:49-50; 창 18:20-21; 19:1-13; 유 7).

     

    신약 성경의 사도적 증언에서 동성 간 성행위는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배경으로 로마서 1:18-27, 고린도전서 6:9-11, 그리고 디모데전서 1:9-11에 언급되어 있다. 역사적 기록은 동성 간의 성관계가 이 시기에 잘 알려진 관행이었으며, 특히 사회 상류층에서 정상적인 관행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이 동성 간의 성관계를 음행과 간음 같은 성적인 죄의 범주에 포함하고 도둑질, 탐욕, 술 취함, 비방, 사기를 포함한 더 광범위한 죄 목록에 포함한 것은 놀랍다. 디모데전서 1:9-11에는 동성애 행위를 금지하는 목록에 부친 살해(patricide), 살인, 살인, 음행, 노예 거래, 그리고 위증을 포함한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모든 사람을 범법자, 반역자, 불경건하고 죄가 많으며 무종교적인 사람이라고 부른다.

     

    고린도전서 6:9에서 바울은 레위기 18:20과 20:13의 두 가지 언급에서 남성 간의 성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이 본문들은 동성 간의 성관계가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바울이 로마서 1:24-27에서 동성 간의 성관계를 언급할 때, 그는 하나님을 향한 인류의 반역이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부하게 되었는지를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묘사한다. 인류가 도덕적으로 완전히 파산했다는 증거로 바울은 우상 숭배와 성적 부도덕의 만연한 관행을 언급한다. 성적 불순결과 관련하여 바울은 특히 여성 간의 성관계와 남성 간의 성관계를 정죄하는데, 이는 당시 세련된 문화로 여겨졌던 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관행이었다.

     

    동성 간의 성관계에 대한 성경의 모든 언급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행위를 성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위반하고 창조주의 선한 설계를 왜곡하는 것으로 간주하므로 그것이 죄악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무지로든 의식적으로든 유혹에 넘어가 죄를 범한 자들도 고백하고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신뢰하므로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음을 확신시켜 준다.

     

    우리는 교회 안팎에서 많은 사람이 동성에게 끌림을 경험하며,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또는 지배적인 끌림이라는 것을 인지한다. 기독교인은 유혹에 저항하고 욕망과 행위 모두에서 성적 거룩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성경의 주장은 동성에게 끌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성에 끌리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우리는 동성에게 끌리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공동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인식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우리의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음을 회개한다.

     

    우리는 기독교 지도자들과 지역 교회들이 우리 공동체 안에 동성에게 끌림을 경험하는 교인들이 존재함을 인지하며, 목회적 돌봄과 건강한 사랑과 우정의 공동체를 발전시킴으로써 제자 훈련을 지원할 것을 촉구한다.[2]

     

    [이어서 계속 보기]

     

    [전문] 제4차 로잔대회 서울선언문

    대한민국 인천에서 열린 제4차 로잔대회는 세계 선교에 헌신한 놀라운 운동의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이다. 1974년 제1차 로잔대회에는 150여 개국에서 2,700명의 교회 지도자이 함께 모여 온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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