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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해임정 화합’ 손정도·안창호… 교회, 국론 통합에 매진해야”
    교단·단체 2024. 12. 9. 19:36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노형구 기자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은 지난 8월 8일 제13대 독립기념관장에 취임했다. 김 관장은 지명 당시 그가 과거 강연에서 한 ‘1948년 건국절’ 발언으로 인해 ‘뉴라이트’ 등 여러 논란에 휘말렸다. 김 관장은 “나는 그런 주장을 해본 적이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1919년부터 1948년까지가 건국의 과정이었고, 1919년 당시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공헌한 인사들 모두 훌륭한 분들”이라며 “다 함께 이들을 존경하면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국가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상해임시정부 안에서도 파벌끼리 대립이 심했는데, 그 당시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대표적 인물로 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와 김인전 목사 등을 꼽을 수 있다”며 ”오늘날 한국교회도 대한민국이 하나 되는 데 각성해야 할 때“라고 했다. 다음은 독립기념관 관장실에서 가진 그와의 인터뷰 전문.

     

    -김형석 관장께선 독립기념관장 임명 당시 ‘일제강점기 국적은 일본’이라는 발언으로 논란에 직면했었다. 관장님이 당시 했던 발언의 진의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 발언의 진의는 이렇다. 관장 후보자 심사 인터뷰를 할 때, 심사위원이던 이종찬 광복회장이 ‘일제 시대 우리 국민의 국적은 어디인가요?’라고 묻길래, ‘일제 시대는 우리가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일본 국적이지요. 그래서 독립운동을 한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나중에 앞부분은 자르고, 뒷부분은 ‘일본 신민’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건국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으로 시작되어 1948년 정부 수립으로 완성됐다’는 발언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됐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건국’은 현재의 국가 시스템을 갖게 된 시점을 말한다. 우리만큼 역사가 오래된 이스라엘이나 중국도 1948년과 1949년에 건국했다고 한다. 광복회에선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임시’였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누구도 건국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나라를 세우는 대업이 한순간에 이뤄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령 미국은 1776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정부가 완성되기까지 13년이 걸렸다. 이렇게 생각하면 대한민국도 3.1운동으로 자주독립을 선언했지만, 1919년 임시정부 수립부터 1948년 정식 정부가 세워질 때까지 29년에 걸쳐 ‘건국의 과정’을 거쳤다. 이처럼 건국을 ‘특정 시점’이 아니라, ‘건국의 과정’으로 보자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도 나와 같은 주장을 펼쳤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이 진정한 광복’이라는 발언의 진의도 궁금하다.

     

    “<제헌국회 속기록>을 보면 1945년 8월 15일은 ‘해방절’, 1948년 8월 15일은 ‘독립절’이라고 기록돼 있다. 1949년 5월 국무회의에서는 ‘1948년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하기로 의결했고, 1949년 8월 15일을 제1회 ‘독립기념일’로 기념했다. 이후 같은 해 9월, 국회에서 당시 백관수 법제사법위원장이 ‘독립절’과 ‘해방절’을 함께 기리자는 취지에서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명칭을 변경하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안해 채택됐다.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1953년 광복절이 ‘제6회’에서 ‘제9회’로 변경되면서 올해로 광복절 79주년을 기념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헌국회 회의록> 등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1948년 8월 15일이 ‘광복’이다. 하지만 이것은 학자적인 입장이고, 공직자인 독립기념관장으로서는 1953년 이후 관행상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의 시점으로 삼고 있는 현실을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내가 부산 강연에서 ‘1948년 8월 15일이 진정한 광복’이라고 말한 또 다른 취지를 설명하겠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됐지만 주권을 회복하지 못한 채 미군정 통치하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1948년 8월 14일까지 대한민국은 국제적으로 주권과 국민 국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48년 5월 15일 치러진 자유 총선거를 통해 국민 주권이 확립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그해 8월 15일에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독립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래서 나는 역사학자 입장에서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15일도 중요하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룬 1948년 8월 15일이 진정한 의미에서 광복이라고 발언한 것이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노형구 기자

    -광복회에선 김 관장님을 ‘뉴라이트’ 인사로 규정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뉴라이트는 1990년대 신자유주의자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대한민국에선 이명박 정부 때부터 과거 운동권이었다가 보수로 전향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됐고, 교계 인사 가운데는 김진홍 목사가 중심에 자리했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선 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를 필두로 한 낙성대연구소 계열을 뉴라이트로 본다. 이들은 일제강점기가 우리나라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나는 지금까지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하거나 이와 관련한 내용의 글을 쓴 적도 없다. 물론 낙성대연구소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광복회에서는 그런 나를 뉴라이트 인사라고 매도했다.”

     

    -건국절 논란은 왜 발생하는 것이고, 김 관장님께서는 건국절 제정에는 어떠한 입장인가?

     

    “나는 <끝나야 할 역사전쟁>에서 건국절 제정에 반대했다. 광복절이 바로 건국(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것인데,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지, 건국절을 제정하자고 주장해서 또 다른 사회적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광복절은 우리나라가 일제 36년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해방절’과 미군정 통치에서 벗어나 주권 국가를 세운 ‘독립절’ 모두를 내포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3.1운동으로 시작된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을 근거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 건국 원년이라는 주장도 제기한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해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는 말은 그 정신과 역사적 사실을 존중한다는 의미지, 그때로부터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뜻은 아니다. 다시 말해, 헌법 전문의 상해임시정부 법통 계승은 1919년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의 역사성을 계승해서 대한민국이 세워졌다는 선언적 취지다. 그간의 헌법재판소 판례를 봐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1919년부터 건국 사업이 시작돼 1948년에 완성됐다고 주장한다.”

     

    -1945년 11월 서울 정동교회에서 조선기독교남부대회 주최로 열린 임시정부 요인 환영대회에서 해방 정국의 ‘3대 영수’였던 김구와 김규식, 이승만은 ‘기독교 건국론’을 강조했다. 이들이 기독교 건국론을 주창했던 배경을 평가한다면?

     

    “이들은 모두 크리스천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특징은 미국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당시 공통된 생각은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미국을 세운 것은 축복받은 사건이라고 가르친 당시의 신앙교육에서 기원했다. 그러면서 자유민주주의도 당연히 기독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했다.”

     

    -기독교가 3.1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던 요인은 뭐라고 보는지?

     

    “첫째, 일찍부터 기독교인들은 애국심이 강했다. 선교사들 기록에 따르면 한반도를 여행하다 대문에 태극기를 걸어놓은 집은 모두 기독교인이 살았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교회에 가면 애국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다. 이처럼 당시 기독교인은 민족정신이 투철했다. 그래서 독립운동의 세력화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이뤄진 측면이 강했다. 3.1운동을 주도한 세력도 한 부류는 남강 이승훈 선생 등 105인 사건 관련자가 주축인 평안도 세력, 다른 부류는 감리교를 중심으로 서울에서 형성된 YMCA 세력이다.

     

    둘째, 종교시설과 학교를 동시에 소유하며 전국적 조직을 갖고 있던 집단은 기독교뿐이었다. 연희, 배재, 이화, 경신 등 재학생들이 독립 선언서를 갖고 자신들의 출석 교회에 알리면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한 계기가 됐다. 평양신학교를 세운 새뮤얼 A. 모펫 선교사(한글명 마포 삼열)의 아들 새뮤얼 H. 모펫 박사(한글명 마삼락, 프린스턴 신학교 명예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추적한 결과, 철도를 따라 교회 및 5일 장을 중심으로 전개됐다고 기록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서양 선교사들도 독립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대표적인 인물을 뽑자면?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에다가 덧붙여 ‘34인’으로 불리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선교사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강의하던 스코필드 선교사는 3.1운동 현장 사진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고발한 장본인이다. 이 때문에 미 의회 하원 대표단이 방한하여 한국에서 조사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스코필드 선교사가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끼친 공로는 실로 지대하다.”

     

    -이승만의 생전 업적에서나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이승만의 대미 대중 외교 독립운동이 상대적으로 덜 강조된 측면이 있다면, 왜 그렇다고 보는지 궁금하다.

     

    “자유당 정권 집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는 뚜렷하다. 그가 당시에 저지른 과오가 과거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건국에 공헌한 지도자라는 긍정적 업적을 덮어버린 경향이 있다. 일례로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 집권하면서 3.15부정선거와 4.19혁명으로 축출된 게 대표적이다. 설령 이승만 대통령이 한 것이 아니라 그 부하들이 실행한 일이라 해도,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4.19 세대들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일각에선 이승만의 독립운동 업적 가운데 ‘3.1운동 기획설’도 제기한다.

     

    “이승만이 3.1운동을 기획했다는 주장을 고증해 보면 역사적으로 맞지 않은 잘못된 사실이다. 이승만의 3.1운동 기획설에 따르면, 1918년 10월경 여운홍과 샤록스(Alfred M. Sharrocks) 선교사가 하와이 방문 당시 이승만으로부터 3.1운동 대중적 봉기를 거사해달라는 내용의 밀서 전달을 부탁받고, 그해 12월 국내의 송진우·김성수 등에게 전달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운홍의 ‘파리강화회의 참석기’에 따르면, 그는 이승만을 만난 적이 없다. 여운홍은 1918년 11월 스페인 독감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뒤, 프린스턴대학교 신학원을 중퇴하고 일본을 거쳐 1919년 2월 16일 귀국했다. 문제는 여운홍의 실제 귀국 시점이 그가 인촌 김성수를 만나 이승만의 밀서를 전달했다는 ‘3.1운동 기획설’ 시점과 불일치하다는 것이다. 또 여운홍이 입국했을 당시 국내에선 3.1운동 거사 준비가 이미 완료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승만이 3.1운동 이후인 1921년 11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워싱턴회의에 상해임시정부 소속 한국대표단 대표 자격으로 참석해 3.1운동의 실상을 알리고자 했던 건 분명한 공헌이다. 또 그의 미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활동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한편 둘 다 기독교인이었던 이승만과 김구는 후대에 이르러 진영논리로 나뉜 측면이 강하다.

     

    “이승만과 김구는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정치 지도자로 라이벌(Rival)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다. 김구는 ‘선생님, 대통령 하셔야죠’라고 권하는 측근에게 ‘대통령은 국제정치를 잘 아는 우남장 형님(이승만)이 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이처럼 김구는 매일 이화장에 드나들며 이승만과 정치를 의논할 정도로 서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문제를 두고 이승만과 김구 간에 이견이 발생했다. ‘남북연합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던 김구는 결국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불참했다. 정치적 입지에 따라서 서로 간 사이가 멀어진 것이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노형구 기자

    -김 관장께서는 ‘이승만과 김구를 모두 건국의 아버지로 둬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두 인물에 대한 평가를 곁들여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

     

    “국부(國父)를 놓고 후대의 이승만과 김구 진영은 서로 싸운다. 미국은 그렇지 않다. 미국은 독립 선언서 서명자 전원을 비롯해 조지 워싱턴 등 1-6대 대통령까지 건국에 참여한 147명의 인사를 ‘건국의 아버지들’로 추앙한다. 이처럼 미국은 갈등과 분열이 없이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정신이 강하다. 이처럼 대한민국도 이승만, 김구, 신익희, 김규식 등을 건국의 아버지들로 하면 그들의 사상을 다양하게 포용하고 화합을 이룰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도 대한민국을 세우는데 앞장선 독립운동가를 함께 기리자는 취지에서 ‘건국의 아버지들’을 주장한 것이다.”

     

    -해방 직후도 그렇고 현재도 좌우 대립이 극심하다. 당대 화해와 통합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근현대사의 기독교계 인물을 꼽고 일화를 말해 달라. 그리고 지금의 한국교회가 배워야 하는 점도 말해 달라.

     

    “오늘의 국회에 해당하는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은 지역과 이념에 따른 파벌 대결로 갈등이 심했다. 이것을 조정하는 의장은 손정도 목사, 김인전 목사 등 주로 목사들이 맡았다. 그 당시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대표적 인물로 도산 안창호를 꼽을 수도 있다. 이들은 좌우를 하나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손정도 목사는 안창호와 함께 중국 지린에서 서로 돕는 사회를 만들고자 ‘호조’라는 이상촌 마을을 세우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이던 오화영 목사도 통합을 부르짖다가 6.25 전쟁 때 납북됐다. 당시 통합을 이뤄내자는 개신교계 선각자들이 많이 있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그런 마음을 갖고 앞장서 대한민국이 하나 되는 데 각성하고 매진해야 할 때다.”

     

    ▣ 1955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은 건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오산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주경야독하여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1991년부터 총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가 1990년대 중반 북한의 대홍수를 계기로 대북 인도 지원 활동단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한민족복지재단’에 몸담기도 했다. 2007년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를 1기생으로 졸업한 김 관장은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KAICAM)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후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 대한민국역사와미래재단 이사장, 고신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상해임정 화합’ 손정도·안창호… 교회, 국론 통합에 매진해야”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은 지난 8월 8일 제13대 독립기념관장에 취임했다. 김 관장은 독립기념관장 지명 당시 그가 과거 한 강연회에서 했던 발언으로 인해 여러 논란에 휘말렸다. 김 관장은 ‘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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